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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샌드버그 - 오늘은 나의 남편을 보낸지 30일째 되는 날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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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샌드버그 - 오늘은 나의 남편을 보낸지 30일째 되는 날이다

newblue 2021. 2. 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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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요조 님의 글은 무슨 선택을 내리든, 마음의 울림을 따라가라고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덕분에(?) 대학생활 내내 가슴이 뛰는 방향으로 수많은 선택들을 내렸습니다ㅎ.ㅎ 

그리고 오늘 소개해드릴 글은 그 선택의 결과가 설령 안 좋았더라도, 혹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번역글은 http://bit.ly/2jasVnm  Hahn Ryu 블로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원문은 셰릴 샌드버그(페이스북 COO)의 페이스북페이지인 http://bit.ly/1Nfuc0V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나의 남편을 보낸 지 30일 째 되는 날로, 쉘로심(sheloshim, 불교의 49재와 비슷한 유대교의 30일 추모 기간)이 끝난 날이다. 유대교도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땅 속에 묻고 나면, 쉬바(Shiva)라고 하는 7일간의 깊은 애도 기간을 보낸다. 쉬바가 끝나면 일상으로는 어느 정도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떠난 배우자에 대한 종교적 애도가 진정으로 끝나는 것은 이 쉘로심이 끝나는 날이다.

 

지금은 랍비가 된 어렸을 적 친구가, 자기가 읽은 한줄 기도 중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이라며 최근에 해준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는 것이 죽은 듯 하지 않게 해주소서(Let me not die while I am still alive.)’였다. 데이브를 잃기 전엔 몰랐던 이 한 마디의 뜻을 나는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비극은 늘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심장과 허파를 가득 메우는, 생각할 수도, 숨도 쉴 수 없는 공허감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지난 30일간, 나는 이 공허감에 빠져 지냈다. 앞으로 역시 이런 텅 빈 듯한 느낌에서 완전히 벗어나오긴 어려울 것임을 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는 앞으로 계속될 삶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쉘로심의 끝을 기리고 내가 다른 이들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함이다. 상실의 슬픔은 대단히 사적인 경험이다. 남들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를 공유해준 분들의 용기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마음을 터놓은 이들 중에서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내가 배운 것을 나누고자 한다.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내가 겪은 비극적인 경험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내게 지난 30일은 30년 같았다. 30년치만큼 더 슬펐으며, 30년치만큼 더 현명해졌다.

 

나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내 아이들이 아빠를 잃고 우는 모습을 볼 때 내가 엄마로서 느끼는 고통의 깊이와 내 엄마가 내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음을 통해서 말이다. 엄마는 내가 내 침대 옆 빈자리에서 느끼는 공허감 메꿔주기 위해, 매일 밤 내가 울다 지쳐 잠드는 모습을 지켜 주셨다. 내가 흘릴 눈물과 내 슬픔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당신의 눈물은 꾹 참으시면서. 엄마는 내가 느끼는 비통함이 남편을 잃은 내 자신의 아픔일 뿐만 아니라, 아빠를 잃은 내 아이들에 대해 내가 엄마로서 느끼는 고통이기도 함을 말해 주셨다. 나는 그 뜻을 남편을 잃은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 그 속에 감출 수 없는 당신의 고통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줄지 여태 잘 몰랐음도 깨닫게 되었다. 애초부터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다 잘 될거라고, 희망이야 말로 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라고만 여겼다. 한 번은 말기 암환자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가장 듣기 싫은 위로가 ‘다 좋아질 거야’라는 말이라고. 다 괜찮아 질지 어떻게 아나,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나 하냐는 거였다. 나는 지난 한 30일간을 경험을 통해서야 이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때로 진정한 공감이란, 괜찮아 질 거라고 되뇌는 게 아니라 ‘괜찮아지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나도 아이들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위로를 전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럴 거라 믿지만, 그게 예전 같이 충만하고 완전한 기쁨은 아닐 거야.’

 

반면에,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예전과 같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말들이야 말로 내게는 큰 위로가 되는데, 그건 이들의 말이 사실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는, 같은 선의를 담은 인사일지라도, ‘잘 지내요?(How are you)’하는 인사보다 ‘오늘 좀 어때요?(How are you today)’라는 인사가 더 낫다. 사람들이 ‘잘 지내요?’ 하고 내게 물으면 나는 ‘내 남편이 한 달 전에 죽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요?’하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좀 어때요?’라는 인사를 들으면, 그 사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그날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일상의 작은 것들이 생과 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지금이야 우리는 데이브가 현장에서 바로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앰뷸런스에서도 그 사실을 몰랐다. 병원까지 가는 과정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뎠다. 나는 그 때 몇 분을 아끼자고 길을 내주지 않은 차 한대 한대를 아직도 증오한다.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운전을 해 봤지만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길을 비켜 주자. 누군가의 부모나 배우자, 아이의 생명이 걸려있는 일이다.

 

또 나는 배웠다. 모든 게 얼마나 덧없이 ‘느껴질 수’ 있는지, 혹은 어쩌면 얼마나 ‘실제로’ 모든 게 덧 없을지.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토대는 아무런 경고 없이 무너질 수 있다. 지난 30일간, 나는 남편을 잃으면서 삶을 지탱해온 여러 기반을 동시에 잃은 아내들의 사연을 여럿 들었다. 배우자를 잃고 도움을 기대할 곳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 경제적 위기과 감정적 혼란을 감당하고 있다. 주위의 도움이 절실한 여성들과 이들의 가족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된다.

 

나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구하는 법을 배웠다. 또 내가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장녀이며, 한 회사의 최고운영책임자였다. 늘 계획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대개 도움을 주는 쪽이었지, 도움을 받는 쪽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계획하지 않은 사고로 남편을 잃고 나자,  나는 사실상 아무런 일도 할 수 상태에 빠져버렸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나를 대신해 많은 것들을 처리하고 돌봐줬다. 내가 앉을 곳을 안내해주고, 끼니를 챙겨 줬다. 나와 내 아이들은 이들로부터 아직까지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나는 회복력(resilience)이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아담 그랜트는 심리적 충격으로부터의 회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와 더불어 내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게 뭔지 알려 주었다. 첫째는 내부 귀인 경향성(personalization)의 극복이다. 내 잘못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그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버리고, 내 잘못이 아님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라고 일러주었다. 둘째는 이런 상태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차차 나아질 것임을 상기하며 고통의 영속감(permanence)의 극복하는 것이다. 셋째는 삶의 건강한 구획을 마련하여 비극적인 사건이 일상의 모든 부분을 잠식(pervasiveness)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일터로의 복귀는 내게 구원처럼만 느껴졌다. 다시금 관계 속으로 들어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음을 느낌을 느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관계들이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음을. 나와 마주치는 동료들의 눈 속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이유는 알고 있다. 도와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을 내 앞에서 언급해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만일 내가 얘길 꺼낸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는 깨달았다. 아끼는 동료들과의 거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함을. 이는 내가 예전이라면 보여주지 않았을 나의 약한 모습을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vulnerability)을 노출시켜야 함을 뜻한다.

 

나는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어떤 질문이든 솔직하게 묻는다면 대답을 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또 각자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다고 일러주었다. 동료 중 한 명은 우리 집 근처에 몇 번이나 왔다가도, 들러도 될지 확신이 없어 초인종을 누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동료는 내가 곁에서 말실수를 할까 두려워 몸이 굳어졌다고 했다. 이렇게 터놓고 이야길 나누자, 우리 사이에 말과 행동으로 실수를 할 까봐 생겨나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에는 방 안에 앉아 있는 코끼리가 나온다. 그 코끼리는 방 안에서 ‘네, 제가 코끼리 맞습니다.’하며 전화를 받는다. (역자 주: ‘방안의 코끼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 하기 어려운 문제를 상징하는 관용적 표현) 내가 방안에 있는 그 ‘불편한 코끼리’의 존재를 터놓고 언급하자, 우리는 녀석을 방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연다는 것이 늘 쉽지만은 않다. 아이의 학교에서 학예회(Portfolio Night)가 열렸을 때다. 아이들은 벽에 걸린 자신들의 작품을 부모들에게 자랑스레 보여주고 있었다. 내 상황을 아는 그곳 부모들은 모두 무척 친절해서, 내와 눈을 맞추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무너질까 두려워 그곳에 있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있어야 했다. 그 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그분들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이전에는 당연시하던 것들(예컨대 삶)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법 말이다. 남편을 잃은 비통함만큼이나 매일 아이들을 보며 그저 이들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쁨을 느낀다. 아이들의 스쳐가는 미소 하나, 작은 포옹 하나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더 이상 예전처럼 하루하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 번은 친구가 말했다. 다들 생일을 챙기는 것이 너무 허례처럼 느껴져 자기는 생일을 챙기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장난해? 생일은 축하하라고 있는 거야. 매년 생일을 보낼 수 있다는 걸 행운으로 생각하라고.’

 

아마 돌아오는 다음 내 생일은 매우 슬픈 생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그 어느 생일보다도 더욱 전심을 다해 내 생일을 축하하겠노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나는 나와 슬픔을 함께 해 준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한 번은 동료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내가 만나본 적이 없는 그의 아내가 내 소식을 듣곤 학교로 돌아가 그간 몇 년이나 미뤄왔던 학업을 마저 좇기로 결정했다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밀고 나아가는게 중요하다(Leaning in)는 내 믿음에 대한 지지와 공감의 뜻으로  밀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내 주위의 다른 여러 남편들과 그 밖의 세상의 많은 남편들 역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내 남편 데이브의 삶을 기려 주고 있다.

 

너무 많은 도움을 준 내 가족, 친구들.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줄 것임을 다시 확인해준 이 모든 분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 잔혹한 상실감과 고립감에 잠겨 있을 때, 이 텅 빈 감각이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영원처럼 이어질 때, 나를 건져 줄 것은 바로 이 얼굴들이다. 이들에 대한 내가 느끼는 고마움엔 끝이 없다.

 

하루는 가까운 친구와 아이가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아빠 데이브가 없었다. 친구는 자기가 대신하여 데이브의 빈자리를 채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울면서 소리쳤다. ‘내가 원하는 건 내 남편 데이브라고. 옵션 A라고.’ 그 친구는 그는 내 어께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하지만 옵션 A는 이제 없는걸, 옵션 B에서 최선을 다해 보자구.’

 

데이브, 당신의 기억을 기리고 당신의 아이들이 받아야 할 사랑을 모두 주기 위해 옵션 B를 통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약속합니다. 비록 쉘로심은 끝났지만 저는 아직 옵션 A가 그립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리울 거고요. ‘슬픔에는 끝이 없고 사랑에도 끝이 없다’는 보노(U2) 노래처럼. 사랑합니다, 데이브.

 

 

옵션 A가 없어졌다면, 그래도 옵션 B에서 최선을 다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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